정신 감옥
제24화
발행일: 2025년 05월 25일
릴리는 끝없는 어둠 속으로 추락했다. 아니, 추락이라기보다는… 존재 자체가 해체되어 미립자 단위로 흩어지는 듯한 끔찍한 감각이었다.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무너진, 기이하고 뒤틀린 차원의 틈새를 얼마나 헤맸을까. 마침내 그녀의 의식은 차갑고 단단한 무언가 위에 내던져졌다.
눈을 떴을 때, 그녀는 텅 빈 공간에 홀로 서 있었다. 사방은 끝없이 펼쳐진 거울로 이루어진 듯, 자신의 모습만이 무한히 반사되고 있었다. 바닥도, 천장도 없었다. 오직 자신과, 자신을 비추는 무수한 허상들뿐. 이곳은 물리적인 공간이 아니었다.
“환영한다, 나의 작은 실험체.”
레이셀의 목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마치 공간 자체가 그녀의 목소리로 이루어진 것처럼.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의 차갑고 잔인한 의식이 릴리의 온몸을 옭아매는 듯했다.
“여기는 네 정신의 가장 깊은 곳이자, 나의 놀이터지. 네 그 보잘것없지만 흥미로운 능력을 속속들이 해부해 줄 생각이야.”
릴리는 공포에 질려 몸을 떨었다. 이곳은 레이셀이 만든 고차원의 ‘정신 감옥’. 의식을 직접 속박하고 고문하며 분석하는, 양자적 구조물이었다. 레이셀의 목적은 명확했다. 릴리가 가진 미지의 양자 관측 능력의 비밀을 파헤치고, 그것을 통제하거나 혹은 완전히 파괴하는 것.
고문은 즉시 시작되었다.
릴리의 눈앞에 끔찍한 환영이 펼쳐졌다. 피투성이가 된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 잔인하게 살해당한 머서 교수의 공허한 눈동자. 자신의 손목을 긋던 순간의 고통과 외로움. 그녀가 겪었던 가장 끔찍한 트라우마들이 현실처럼 생생하게, 그리고 무한히 반복되었다.
“안 돼… 제발… 멈춰!”
릴리는 비명을 지르며 귀를 막았지만 소용없었다. 고통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기억, 그녀의 감정 자체가 고문의 도구가 되어 끊임없이 재생되고 증폭되었다. 레이셀은 그녀의 정신 방벽을 무너뜨리고, 그 안에 숨겨진 능력의 핵을 끄집어내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극심한 고통 속에서, 역설적이게도 릴리의 내면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분노. 그리고 생존 본능. 그녀는 이대로 무너질 수 없었다. 어머니와 스승의 복수를 해야 했다. 그리고… 살아야 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자신의 의식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레이셀이 강제로 주입하는 환영에 저항하며, 자신의 의식이 가진 힘의 본질을 어렴풋이 깨닫기 시작했다. 관측. 그것은 단순히 보는 행위가 아니었다. 확률로 존재하는 무수한 가능성 속에서, 특정한 현실을 ‘선택’하고 ‘고정’하는 힘. 그녀의 의지 자체가 현실을 창조하는 열쇠였다.
‘나는… 선택할 수 있어…’
릴리는 이를 악물었다. 그녀의 눈동자에서 희미하지만 강렬한 푸른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녀는 레이셀의 정신 감옥이라는 현실에 균열을 일으키기 위해, 자신의 모든 의지를 걸고 저항하기 시작했다. 비록 미약했지만, 그것은 반격의 첫 불씨였다.
코바치의 지하 요새, 통제실.
충격과 혼란이 폭풍처럼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무거운 침묵만이 감돌았다. 에단은 무너져 내린 채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고, 올리비아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숨을 몰아쉬었다. 그들은 방금 전, 인간의 이해를 아득히 넘어선 광경을 목격했다.
엘라나. 그 불가사의한 여인이 보여준 초인적인 힘. 그리고 레이셀이라는 또 다른 존재와의 격렬한 전투. 그것은 SF 영화의 한 장면이 아니었다. 현실이었다. 딸이 납치되는 끔찍한 현실의 일부였다.
“대체… 당신… 정체가 뭐야?”
에단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텅 빈 동굴처럼 공허하게 울렸다. 그는 엘라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전투의 여파로 옷이 일부 찢어지고 얼굴에는 작은 상처가 나 있었지만, 눈빛만은 여전히 차분하고 깊었다.
엘라나는 잠시 침묵했다. 이제 더 이상 숨길 수도, 숨길 필요도 없었다. 그녀는 에단과 올리비아를 차례로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당신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입니다. 지구인이 아니죠.” 그녀의 고백은 담담했지만, 그 무게는 방 안의 공기를 짓눌렀다. “저와 레이셀은… 이 우주의 질서를 관리하는 고대 종족의 일원입니다.”
에단과 올리비아는 숨을 삼켰다. 외계인. 막연하게 추측하고 두려워했던 존재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에단의 머릿속에서 수많은 의문과 혼란이 뒤엉켰다. 그녀는 왜 이곳에? 그의 연구와 무슨 관련이 있는가? 그리고 사만다의 죽음은?
“우주는… 당신들이 아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엘라나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은 두 사람의 세계관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것이었다. 그녀는 손짓으로 허공에 희미한 홀로그램 영상을 만들어냈다. 복잡한 수식과 기하학적인 패턴들이 별빛처럼 반짝였다.
“박사님의 이론… 양자 관측 이론은, 놀랍도록 진실에 근접해 있습니다. 하지만 그 규모는 박사님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죠.” 엘라나의 시선이 에단을 향했다. “우주는… 거대한 정보 처리 시스템과 같습니다. 그리고 이 시스템은 극도의 효율성을 추구하죠.”
그녀는 홀로그램을 조작하며 설명을 이어갔다. “여러분이 사용하는 컴퓨터 프로그램의 ‘lazy loading’ 개념을 아십니까? 필요할 때까지는 데이터를 로딩하지 않아 시스템 자원을 절약하는 방식이죠. 우주도 마찬가지입니다. 관측되지 않는 영역은… 굳이 완전한 물리적 실체로 존재할 필요가 없습니다.”
홀로그램 영상은 광활한 우주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엘라나의 설명과 함께, 우리가 아는 별과 은하들은 마치 거대한 캔버스 위에 그려진 그림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그림 바깥의, 아직 칠해지지 않은 광대한 여백.
“관측되지 않은 우주는… 에너지와 정보의 가능성, 즉 확률적 파동 상태로만 존재합니다. 마치 렌더링되지 않은 그래픽 데이터처럼요.” 엘라나의 목소리는 냉정했다. “그러다 지적인 존재, 의식을 가진 관측자가 특정 영역에 주의를 기울이면, 그 순간 우주 시스템은 해당 영역의 데이터를 ‘렌더링’하여 물리적 현실로 구현합니다. 당신들이 별을 관측할 때, 그 별은 비로소 당신들을 위해 ‘존재’하게 되는 겁니다.”
“말도 안 돼…” 올리비아가 창백한 얼굴로 속삭였다. 그녀의 과학적 상식과 이성이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충격이었다. 우주가… 우리가 볼 때만 존재하는 거대한 환상이라고? 그렇다면 우리가 아는 모든 물리 법칙은? 우주의 역사는?
에단은 얼어붙은 듯 엘라나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그의 이론이 맞았다. 하지만 그것은 영광스러운 발견이 아니라, 끔찍한 진실의 폭로였다. 우주가 프로그램이라면, 우리는 무엇인가? 프로그램 속의 캐릭터? 아니면… 버그?
“하지만 문제는… 인류의 ‘의식적 관측’ 능력이 최근 수 세기 동안 기하급수적으로 발전했다는 겁니다.” 엘라나의 표정이 처음으로 미묘하게 굳어졌다. “망원경, 전파 탐지기, 그리고… 박사님의 센서와 같은 양자 관측 기술. 당신들은 우주의 ‘소스 코드’에 너무 빠르고 깊숙하게 접근하고 있어요. 당신들의 관측은 단순히 현실을 렌더링하는 것을 넘어, 때로는 시스템 자체를 불안정하게 만들거나 예측 불가능한 방식으로 ‘수정’하기도 합니다.”
그녀는 릴리가 가진 특별한 능력이 바로 그 위험한 잠재력의 극단적인 발현일 수 있다고 암시했다.
“저희 종족은… 이 우주 시스템의 안정성을 유지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수억 년 동안, 우리는 여러 문명의 흥망성쇠를 지켜보며 균형을 유지해왔죠. 당신들의 문명 역시 우리의 감시 대상이었습니다.” 엘라나의 눈빛은 깊고 차가웠다. 마치 신이 인간을 내려다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하지만 인류의 잠재력은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었고, 내부에서도 의견이 갈렸습니다. 레이셀처럼 인류를 즉각적인 위협으로 간주하여 제거하려는 강경파와… 저처럼 다른 가능성을 모색하려는 온건파로.”
충격적인 진실의 폭로 앞에, 에단과 올리비아는 할 말을 잃었다. 그들이 평생을 바쳐 연구해 온 우주는 거대한 시뮬레이션일 수 있으며, 인류는 그 시스템의 관리자들에게 감시당하는 존재였다. 그들의 자부심, 지식, 존재의 의미 자체가 뿌리부터 흔들리는 순간이었다.
“그럼… 내 아내, 사만다는…?” 에단이 마침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의 이론과 아내의 죽음이 이 거대한 우주적 음모 속에서 어떻게 연결되는지 알아야 했다.
엘라나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그녀의 죽음 역시… 레이셀과 관련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사만다 리브스는… 당신이 모르는 방식으로 우리 종족의 존재와 당신의 연구가 가진 위험성을 인지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제거 대상이 되었을 가능성이…”
에단의 눈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솟았다. 분노와 슬픔, 그리고 거대한 진실 앞에 선 인간의 처절한 무력감. 하지만 지금은 감정에 휩쓸릴 때가 아니었다. 그의 딸, 릴리가 저 괴물의 손에 잡혀 있었다. 그가 이해하기 시작한 이 끔찍한 우주의 법칙 속에서, 딸을 되찾아야 했다.
“릴리는… 어디로 데려간 거지? 구할 수 있는 건가?”
엘라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릴리는 레이셀이 만든 특수한 위상 공간, 일종의 ‘정신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찾거나 접근할 수 없죠. 하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그녀는 에단의 퀀텀 공명 센서를 가리켰다. “박사님의 센서와 저의 기술, 그리고… 릴리 자신의 의지가 있다면, 그녀의 위치를 특정하고 구출할 통로를 열 수도 있습니다.”
에단의 눈에 다시 희미한 빛이 돌아왔다. 절망 속에서 붙잡을 단 하나의 실낱같은 희망. 그는 엘라나를 향해 다가섰다. 그녀의 정체는 여전히 충격적이었고, 그녀를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 릴리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열쇠는 그녀가 쥐고 있었다.
“…뭘 하면 되지?” 에단은 굳은 결의를 다지며 물었다.
한편, 올리비아는 엘라나의 충격적인 고백을 들으면서도 냉정함을 유지하려 애썼다. 외계 존재의 실재, 우주의 비밀. 과학자로서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동시에 릴리가 납치되던 순간 코바치 보안팀이 보였던 미심쩍은 행동들을 떠올렸다.
‘코바치는… 이 모든 걸 알고 있었을까? 아니면… 엘라나조차 모르는 또 다른 거래를 하고 있는 걸까? 이 ‘우주 관리자’라는 존재들과?’
그녀는 엘라나의 도움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코바치에 대한 경계와 조사를 멈추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에단에게 자신의 의심을 조용히 전달했다. 코바치는 단순한 조력자가 아니라, 이 위험한 게임의 또 다른 플레이어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통제실 안, 서로 다른 목적과 의심을 가진 불안정한 동맹이 형성되고 있었다. 에단은 방금 알게 된 충격적인 진실 속에서 딸을 구하기 위해 외계 존재와 손을 잡아야 했고, 엘라나는 자신의 임무와 새로운 감정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시작했다. 올리비아는 그들 사이에서 이성과 경계의 끈을 놓지 않으려 애썼다. 그리고 그들 모두의 등 뒤에는 코바치라는 거대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릴리를 구출하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과 함께, 보이지 않는 암투와 배신의 서막이 조용히 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