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퇴와 추격
제29화
발행일: 2025년 05월 30일
지옥의 교향곡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릴리가 불러온 현실 왜곡의 여파로 레이셀의 기지는 비명을 지르며 스스로를 삼키고 있었다. 벽이 녹아내려 용암처럼 흘렀고, 천장에서는 뒤틀린 금속 파편들이 비처럼 쏟아졌다. 공간 자체가 불안정하게 출렁이며 언제 모든 것이 무(無)로 붕괴될지 모르는 위태로운 상태였다.
레이셀은 생전 처음으로 진정한 공포를 느꼈다. 눈앞의 존재. 저것은 더 이상 하등한 인간 여자아이가 아니었다. 예측 불가능하고, 통제 불가능하며, 자신조차 소멸시킬 수 있는 재앙 그 자체였다. 그녀는 각성한 릴리의 힘이 아직 불안정하며 제어되지 않는다는 것을 간파했다. 지금은 맞서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것이 우선이었다.
“이걸로 끝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변종!” 레이셀은 증오와 두려움이 뒤섞인 외침과 함께 남은 에너지를 끌어모아 다시 한번 차원 균열을 열었다. 그녀는 릴리에게 언젠가 반드시 이 굴욕을 되갚아주겠다는 살기 어린 시선을 던지고는, 뒤틀린 공간 속으로 망설임 없이 몸을 던져 사라졌다.
한편, 전장의 다른 한쪽에서는 에단의 광기 어린 복수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는 올리비아를 앗아간 코바치의 충견, 이고르를 놓치지 않았다. 이고르는 에단의 원시적인 정신 공격과 예상치 못한 물리력에 한쪽 팔을 잃고 처참하게 밀리고 있었다. 에단은 짐승처럼 포효하며 이고르 위에 올라타, 피투성이가 된 주먹으로 그의 얼굴을 무자비하게 내리쳤다.
“네놈 때문에… 네놈 때문에 올리비아가…!”
에단의 주먹이 내려꽂힐 때마다 이고르의 얼굴에서 뼈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피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에단은 멈추지 않았다. 그의 눈에는 오직 복수심만이 이글거릴 뿐이었다. 이고르는 몇 번 반격하려 했지만, 에단의 광기 어린 힘과 정신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며 결국 의식을 잃고 축 늘어졌다. 에단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피 묻은 주먹을 내려다보았다.
“정신 차려요, 모두! 여기서 빠져나가야 해!”
엘라나의 목소리가 에단의 의식을 현실로 끌어당겼다. 그녀는 허공에 힘없이 떠 있는 릴리에게 다가가 그녀를 진정시키고 보호막을 펼쳤다. 각성의 대가로 릴리의 에너지는 급격히 소진되고 있었다.
엘라나는 부상당한 할로우와 남은 MI6 생존자들을 모으고, 구조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에단을 재촉했다. “에단! 정신 차려요! 릴리를 데리고 나가야죠! 올리비아의 희생을 헛되게 할 건가요!”
올리비아의 이름에 에단의 광기가 잠시 가라앉았다. 그는 이고르의 피떡이 된 시체를 경멸스럽게 쳐다보고는 비틀거리며 엘라나에게 합류했다.
하지만 그들이 떠나려는 순간, 바닥에 쓰러져 있던 이고르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는 희미하게 남은 의식을 쥐어짜내, 팔목에 찬 단말기의 숨겨진 버튼을 눌렀다. 코바치에게 보내는 마지막 신호이자, 기지 자폭 시퀀스 가동 명령이었다.
위이이잉-! 경고! 자폭 시퀀스 가동! 남은 시간 3분!
기지 외부의 프로메테우스 호에서 수십 기의 소형 드론들이 발사되어 경고 메시지를 말하며 기지 내부로 날아들었다. 드론들은 생존자를 공격하는 대신, 기지 곳곳에 자리를 잡고 주변의 데이터를 미친 듯이 수집하기 시작했다. 전투 데이터, 에너지 패턴, 심지어는 파괴된 구조물의 잔해 정보까지. 코바치는 실패 속에서도 최대한의 정보를 확보하여, 다음 단계를 준비하려 하고 있었다. 드론들은 데이터 전송을 완료하는 즉시 스스로 폭파될 예정이었다.
“젠장! 어서 빠져나가야 해!” 할로우가 신음하며 외쳤다.
엘라나는 부상당한 할로우와 남은 MI6 생존자들을 모으고, 에단을 재촉했다. “에단! 정신 차려요! 릴리를 데리고 나가야죠! 올리비아의 희생을 헛되게 할 건가요!”
올리비아의 이름에 에단의 광기가 잠시 가라앉았다. 그는 이고르의 피떡이 된 시체를 경멸스럽게 쳐다보고는 비틀거리며 엘라나에게 합류했다.
기지 전체가 붉은 경고등과 자폭 카운트다운으로 아수라장이 된 가운데, 코바치의 데이터 수집 드론들이 미친 듯이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탈출하려는 순간, 다시 의식을 찾은 이고르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그는 피범벅이 된 얼굴로 씨익 웃으며, 남은 한 팔로 허리춤에서 소형 플라스마 권총을 꺼내 들었다. 데이터 수집 드론들이 코바치에게 정보를 전송할 시간을 벌려는 속셈이었다.
“여기서… 다 죽는 거다…” 이고르가 쉰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총구를 릴리에게 겨누었다.
그 순간, 엘라나의 품에 안겨 의식을 잃어가던 릴리의 눈꺼풀이 희미하게 떨렸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마지막 남은 힘을 짜내듯 이고르를 응시했다. 그녀의 입술이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움직였다. 마치 ‘사라져’라고 말하는 것처럼.
퍼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엉!!!
이고르의 몸이 안쪽에서부터 터져 나갔다! 그의 살점과 뼈 조각, 그리고 내장이 사방으로 흩뿌려지며 끔찍한 피의 비를 만들었다. 비명조차 지를 틈 없는, 완전한 소멸. 동시에, 기지 내부로 침투했던 코바치의 데이터 수집 드론들도 일제히 스파크를 일으키며 폭발했다. 릴리의 마지막 의지가 데이터 전송마저 차단해버린 것이다.
“지금이야!”
릴리는 마지막 힘을 소진하고 엘라나의 품속으로 완전히 정신을 잃었다. 자폭 카운트다운은 이제 10초도 남지 않았다. 프로메테우스 호는 아직 멀리 있었다.
엘라나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그녀는 의식을 잃은 릴리를 단단히 부축하고, 에단과 부상당한 생존자들을 향해 외쳤다. “모두 제게 붙으세요! 꽉 잡아요!”
엘라나가 두 손을 앞으로 뻗자, 그녀의 손끝에서 푸른빛의 에너지가 격렬하게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공간 자체가 그녀의 의지에 따라 뒤틀리는 듯, 허공에 미세한 균열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레이셀이 사용했던 것과 유사하지만, 좀 더 안정적이고 정교한 차원 균열이었다.
“이건…?” 에단과 할로우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설명은 나중에! 어서!”
균열은 순식간에 사람 키만큼 커졌고, 그 너머로는 익숙한 금속 벽면이 보였다. 프로메테우스 호의 내부였다. 엘라나가 미리 함선 내부에 좌표를 설정해 둔 것이었다.
엘라나는 일행을 균열 속으로 밀어 넣고, 자신도 마지막으로 뛰어들었다. 그들이 차원 균열을 통과하는 순간, 등 뒤에서 거대한 섬광과 함께 레이셀의 기지가 굉음을 내며 폭발했다. 강력한 충격파가 닫히는 균열의 가장자리를 뒤흔들었지만, 그들은 마침내 지옥에서 벗어나 프로메테우스 호의 차가운 복도 바닥 위로 굴러떨어졌다.
함선 내부는 예상대로 텅 비어 있었다. 코바치의 용병 부대는 이미 전멸했고, 파일럿은 아마도 코바치의 명령에 따라 먼저 탈출했거나, 혹은 기지의 폭발과 함께 사라졌을 터였다.
차가운 금속 바닥 위에는 생존자들이 탈진한 채 널브러져 있었다. 릴리는 깊은 혼수상태에 빠졌고, 에단 역시 고통과 탈진으로 의식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었다. 할로우는 응급 처치를 받으며 간신히 목숨만 부지한 상태였다.
엘라나는 이 처참한 광경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릴리를 구했지만, 그 대가는 너무나 컸다. 올리비아의 죽음, 할로우와 요원들의 희생, 그리고 에단과 릴리가 겪어야 했던 끔찍한 각성. 그녀의 마음속에서 임무와 연민, 그리고 인류라는 존재에 대한 경외와 두려움이 복잡하게 뒤섞였다.
그녀는 프로메테우스 호의 자동 항법 장치를 가동시켜 지구로의 귀환 경로를 설정했다. 적의 함선이었던 이 검은 유령선은 이제 그들의 유일한 귀환 수단이 되었다. 엘라나는 앞으로 다가올 더 큰 폭풍을 예감하며, 조용히 주먹을 쥐었다. 이것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일 뿐이었다. 지구로 돌아가면, 코바치와의 악연, 그리고 인류의 미래에 대한 더 큰 질문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