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수상태의 속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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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25년 06월 01일

MI6 극비 의료 시설의 차가운 공기 속, 릴리는 투명한 의료 캡슐 안에 누워 있었다. 생명 유지 장치가 규칙적인 소음을 내며 작동했지만, 그녀의 상태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몸 주위를 감싸는 불안정한 양자 요동은 더욱 예측 불가능하게 변화하며 주변의 첨단 의료 장비마저 교란시켰다. 마치 그녀의 존재 자체가 현실의 법칙에 끊임없이 파문을 일으키는 듯했다. 의료진은 속수무책으로 물러나, 경외와 두려움이 뒤섞인 눈으로 이 불가해한 현상을 지켜볼 뿐이었다.

릴리의 의식은 깊고 어두운 심연을 표류하고 있었다. 이곳은 단순한 혼수상태가 아니었다. 그녀 안에서 폭주하는, 각성했지만 아직 길들여지지 않은 거대한 힘과의 처절한 사투가 벌어지는 내면의 전장이었다. 그녀의 의식은 현실과 현실 이전의 근원적인 정보의 바다, 양자 거품이라 불리는 확률의 미궁 사이를 위태롭게 넘나들었다.

눈앞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코드 스트림과 기하학적인 패턴들이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우주의 근본적인 정보 구조. 그녀는 그것을 볼 수 있었지만, 이해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었다. 거대한 힘은 그녀를 집어삼키려 했고, 그녀는 필사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려 버텼다. 고통스럽고 외로운 싸움이었다.

바로 그때, 혼돈의 폭풍 속에서 한 줄기 희미한 빛이 비쳐왔다. 따뜻하고, 슬프고, 사무치게 그리운 느낌. 빛은 점차 형체를 갖추어 갔다. 어머니, 사만다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완전한 인격체는 아니었다. 죽음의 순간, 그녀의 강렬했던 트라우마와 사랑, 그리고 미처 전하지 못한 말들이 양자 상태로 얽혀버린 정보의 잔향, 희미한 의식의 파편이었다.

‘릴리… 내 아가…’

목소리가 아닌, 감정의 파동으로 그녀의 의식에 직접 속삭여왔다. 사만다의 잔영은 릴리를 부드럽게 감쌌지만, 그 이면에는 깊은 슬픔과 다급한 경고의 기운이 서려 있었다. 단편적인 이미지들이 릴리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차가운 미소를 짓는 코바치의 얼굴. 그의 눈동자 깊은 곳에 숨겨진 섬뜩한 야욕.
레이셀의 잔혹한 모습 너머로 보이는, 더욱 거대하고 사악한 그림자의 윤곽.
그리고… 릴리 자신 안에 잠재된, 세상을 구원할 수도 파멸시킬 수도 있는 양날의 검과 같은 힘.

‘조심해야 해… 그 남자 코바치… 보이는 것보다 훨씬 위험해…’

‘레이셀은… 시작일 뿐… 더 큰 위협이…’

‘네 힘은… 열쇠이자… 저주…’

사만다의 경고는 파편적이고 불분명했지만, 릴리의 의식 깊은 곳에 강력한 인장을 남겼다. 어머니는 그녀를 지키기 위해 마지막 남은 흔적을 통해 필사적으로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릴리는 그 메시지를 붙잡으려 애썼지만, 폭주하는 자신의 힘이 다시 그녀를 혼돈 속으로 끌어당겼다. 어머니의 모습은 다시 희미한 빛으로 흩어졌다.

의료 캡슐 밖, 에단은 유리벽에 이마를 기댄 채 딸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릴리가 겪고 있을 고통을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안에서 깨어난 미약한 양자 감응 능력이 딸의 불안정한 양자 요동과 희미하게 공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딸의 비명 없는 비명, 보이지 않는 사투가 그의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그는 눈을 감고 자신의 모든 의식을 집중했다. 딸의 의식과 연결되고 싶었다. 그녀의 고통을 나누고, 그녀에게 힘을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능력은 너무 미약하고 통제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딸의 고통스러운 메아리를 희미하게 느낄 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절망했다. 자신의 능력을 통제하고 강화해야만 했다. 릴리를 구하기 위해서, 그리고… 복수를 위해서.

“그렇게 해서는… 연결될 수 없습니다.”

차가운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엘라나였다. 그녀는 어느새 다가와 에단의 옆에 서 있었다.

“당신의 능력은… 강렬한 감정에 의해 폭주하고 있습니다. 통제되지 않는 힘은 당신 자신과 릴리 모두에게 위험할 뿐입니다.” 엘라나는 에단의 불안정한 에너지 파동을 정확히 읽어내고 있었다.

에단은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당신네들 방식이라도 가르쳐 줄 건가?” 그의 목소리에는 불신과 빈정거림이 섞여 있었다.

엘라나는 그의 반응에 동요하지 않았다. “필요하다면요.” 그녀는 잠시 침묵하더니 말을 이었다. “저희 종족에게는… 수천 년 동안 전해 내려오는 의식 수련법이 있습니다. 양자 파동을 안정시키고, 의식과 에너지를 정밀하게 제어하는 기술이죠. 당신의 잠재력과 결합된다면… 릴리의 의식에 안전하게 접근할 통로를 열 수도 있을 겁니다.”

에단은 갈등했다. 외계 존재의 기술을 배운다고? 하지만 그의 눈앞에는 혼수상태에 빠진 딸이 있었다. 절박함은 불신을 눌렀다. “…가르쳐 줘.”

엘라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에단을 조용한 명상실로 이끌었다. 그리고 복잡한 호흡법과 에너지 흐름을 시각화하는 방법, 의식의 초점을 미세하게 조절하는 고대의 기술을 차분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순한 명상법이 아니었다. 우주의 근본적인 에너지와 공명하고, 자신의 존재를 양자적 수준에서 제어하는 심오한 수련법이었다.

에단은 어색하고 서툴렀지만, 필사적으로 엘라나의 가르침을 따랐다. 그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엘라나에 대한 의심과 불신이 남아 있었지만, 딸을 구하겠다는 절박한 염원이 그를 앞으로 나아가게 했다. 어색하지만 절박한 협력 관계. 인간 아버지의 처절한 사랑과 고대 외계 존재의 미묘한 도움이 기묘하게 얽히기 시작했다.

명상실의 고요함 속에서, 에단의 불안정했던 양자 파동이 아주 조금씩, 미세하게 안정되어 가는 듯했다. 그리고 의료 캡슐 안, 릴리의 손가락 끝이 아주 희미하게 떨렸다. 혼수상태의 깊은 어둠 속에서, 아주 작은 변화의 싹이 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