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난 힘, 커지는 위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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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25년 06월 02일

섬광.
릴리는 마침내 기나긴 어둠의 터널을 벗어났다. 의료 캡슐의 투명한 덮개 너머로, 자신을 애타게 내려다보는 아버지의 얼굴이 보였다. 그녀는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깨어난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전의 릴리 리브스가 아니었다. 혼수상태 속에서 벌어졌던 치열한 사투와 어머니 의식 파편과의 조우는 그녀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여전히 깊고 푸른빛을 띠고 있었지만, 그 안에는 인간적인 감정의 흔들림 대신 차갑고 심오한 이해, 그리고… 압도적인 힘의 무게가 느껴졌다.

“릴리…! 정신이 드는구나!” 에단은 딸의 손을 붙잡으며 울먹였다. 엘라나에게 배운 수련법으로 자신의 양자 감응 능력을 조금이나마 안정시킨 덕분인지, 그는 딸의 의식이 돌아오는 순간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릴리는 아버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애끓는 감정이 파동처럼 느껴졌지만, 그녀 자신의 감정은 마치 잔잔한 호수처럼 고요했다. 슬픔도, 기쁨도, 분노도 희미했다. 대신, 세상의 모든 것이 확률과 정보의 흐름으로 보였다. 아버지의 걱정, 의료진의 분주함, 심지어 벽 너머 할로우가 꾸미는 계획까지도 희미한 데이터 스트림처럼 그녀의 의식에 흘러 들어왔다.

“괜찮아요, 아빠.” 릴리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고 차분했다. 그녀는 자신의 몸을 일으켰다. 몸 상태는 놀라울 정도로 완벽하게 회복되어 있었다. 혼수상태 동안 그녀 안의 힘이 스스로를 치유하고 최적화한 결과였다. 그녀의 양자 관측 능력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고 정교해져 있었다. 이제 그녀는 단순히 현실을 재정의하는 것을 넘어, 다중 차원의 정보망에 접속하고 미래의 확률까지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한 듯했다.

하지만 그 힘은 축복이자 저주였다. 어머니의 의식 파편이 남긴 경고처럼. 그녀는 때때로 인간적인 감정의 미묘함을 이해하기 어려워했고,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기보다는 그것을 분석해야 할 데이터로 여기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녀는 경계선 위에 서 있었다. 인간과… 인간을 초월한 존재 사이의 아슬아슬한 경계선.

엘라나는 깨어난 릴리의 변화를 즉시 감지했다. 그녀는 릴리가 자신의 힘을 책임감 있게 통제하고 사용할 수 있도록 본격적인 훈련을 시작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 강력한 힘이 폭주하거나 잘못된 방향으로 사용된다면, 레이셀보다 더 끔찍한 재앙을 초래할 수도 있었다. 엘라나는 릴리에게 고대의 명상법과 에너지 제어 기술, 그리고 아키텍트로서 가져야 할 우주적 윤리와 책임감에 대해 가르치기 시작했다. 릴리는 스펀지처럼 모든 것을 흡수했지만, 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차갑고 예측 불가능했다.

한편, 세상은 조용히 다가오는 폭풍을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알프스 산맥 깊숙한 지하. 알렉산더 코바치는 자신의 비밀 연구 시설에서 광기 어린 미소를 짓고 있었다. 릴리 납치 및 레이셀 기술 탈취 작전은 처참하게 실패했지만, 그는 빈손이 아니었다. 이고르가 소멸하기 직전 필사적으로 전송한 마지막 데이터 패킷. 그 안에는 짧지만 귀중한 정보가 담겨 있었다. 레이셀과 엘라나의 전투 데이터, 각성한 릴리가 보여준 경이로운 현실 조작 능력의 초기 분석 자료, 그리고 레이셀 기지 내부의 에너지 시그니처와 구조 일부에 대한 단편적인 정보였다.

데이터는 불완전했지만, 코바치와 그의 배후에 있는 미라 웰스의 세력에게는 충분했다. 특히 미라 웰스 측은 자신들의 방대한 외계 기술 데이터베이스와 이고르가 보낸 단편적인 정보를 교차 분석하여, 레이셀과 엘라나가 사용하는 기술의 일부 원리를 역설계해내는 데 성공했다. 비록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 원리를 응용한 모방 기술을 개발할 실마리를 잡은 것이다.

“훌륭해… 정말 훌륭하군!” 코바치는 배양 캡슐 안에서 자라나고 있는 끔찍한 형체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는 미라 웰스 측으로부터 제공받은 외계 기술의 모방 원리와 자신의 유전자 편집 기술을 결합하여, 인공적으로 양자 능력을 발현시키는 존재, ‘퀀텀 하이브리드’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아직 초기 단계였고 성공률은 극히 낮았지만, 그의 목표는 명확했다. 릴리와 같은 강력한 능력자들을 대량 생산하여 자신만의 군대를 만들고, 신세계의 지배자가 되는 것. 그는 미라 웰스와 그녀가 속한 제3의 외계 세력과 더욱 긴밀하게 협력하며, 금단의 기술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레이셀 역시 침묵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비밀 기지가 파괴되고 릴리에게 굴욕적인 패배를 당한 것에 대해 치를 떨었다. 그녀는 은하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자신의 추종 세력을 규합하며 복수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녀의 목표는 단순한 인류 제거를 넘어섰다. 변절자 엘라나와 각성한 릴리 리브스, 그리고 감히 아키텍트의 영역을 침범하려 한 코바치까지, 관련된 모든 것을 파괴하고 우주에 자신의 공포를 각인시키는 것. 그녀는 더욱 강력하고 파괴적인 무기와 전략을 개발하며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의 은밀한 움직임은 지구 곳곳에 이상 현상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원인 불명의 국소적 현실 왜곡 현상. 특정 지역에서 중력이 순간적으로 몇 배로 강해지거나 약해지는 현상. 사람들이 짧은 시간 동안의 기억을 통째로 잃어버리는 집단 기억 상실. 심지어 물리 법칙 자체가 일시적으로 변이되어 물건이 공중에 뜨거나 벽을 통과하는 기현상까지.

이러한 현상들은 릴리의 불안정한 능력 여파일 수도 있었고, 코바치나 레이셀의 위험한 실험 부작용일 수도 있었다. 언론은 이를 ‘집단 히스테리’나 ‘미확인 자연 현상’으로 치부했지만, 진실을 아는 MI6와 할로우는 극도의 긴장감 속에서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릴리가 깨어났지만, 세상은 더 큰 위협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깨어난 힘은 새로운 희망인 동시에 더 큰 위험의 씨앗이었고, 어둠 속에서는 인류의 운명을 건 더 거대한 음모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평온한 표면 아래, 파국을 향한 카운트다운이 조용히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