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자 관측의 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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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25년 06월 03일

MI6 극비 시설의 훈련장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었다. 엘라나의 기술로 구현된, 현실의 물리 법칙이 미묘하게 뒤틀린 특수 차폐 공간. 그 안에서 릴리는 엘라나의 엄격한 지도 아래 자신의 폭주하는 힘을 제어하는 훈련에 몰두하고 있었다.

“집중해, 릴리. 네 의식이 곧 현실이야. 확률의 파동을 느껴. 그리고 네가 원하는 단 하나의 현실을 ‘선택’하는 거야.” 엘라나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강철 같은 단호함이 서려 있었다.

릴리는 눈을 감고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소용돌이치는 거대한 에너지의 흐름을 느꼈다. 그녀가 의식을 집중하자, 훈련장 중앙에 떠 있던 금속 구체가 형태를 바꾸기 시작했다. 정육면체, 피라미드, 다시 구체로. 하지만 그녀의 집중이 조금이라도 흐트러지거나 아주 희미하게 남은 감정의 파편이 개입하는 순간, 힘은 여지없이 폭주했다.

콰직-!

금속 구체가 갑자기 뒤틀리며 날카로운 파편으로 터져 나갔다. 파편 중 하나가 훈련장의 벽에 부딪히자, 벽의 일부가 순간적으로 투명하게 변했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의도치 않은 현실 왜곡. 작은 실수였지만, 만약 외부였다면 끔찍한 결과를 낳았을 수도 있었다.

“아직… 어려워요.” 릴리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표정에는 좌절보다는 분석적인 고찰이 더 강하게 드러났다. 마치 복잡한 수학 문제를 풀지 못했을 때처럼. 그녀는 가끔 엘라나의 표면적인 생각이나 감정을 읽어내기도 했는데, 그것은 훈련에 도움이 되기보다는 방해가 될 뿐이었다. 타인의 내면 정보는 그녀에게 불필요한 노이즈였다.

엘라나는 릴리의 차가운 반응을 보며 내심 깊은 우려를 느꼈다. 저 아이는 힘을 얻는 대가로 인간성을 잃어가고 있었다. 저 힘을 올바르게 인도할 수 있을까? 아니면 자신이 또 다른 괴물을 키워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다른 한편, 에단은 엘라나가 가르쳐 준 고대의 수련법에 매달리고 있었다. 그의 양자 감응 능력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발전하고 있었다. 이제 그는 눈을 감고도 시설 내부의 에너지 흐름이나 사람들의 미약한 양자 파동을 감지할 수 있었다. 심지어는 멀리 떨어진 릴리가 훈련 중에 일으키는 미세한 공간 왜곡의 여파까지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힘에는 대가가 따랐다. 능력을 사용하면 할수록, 그의 감정은 메말라갔다. 올리비아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과 코바치를 향한 불타는 복수심은 여전히 존재했지만, 그것은 뜨거운 용암이 아니라 차갑게 식어버린 분석 대상처럼 느껴졌다. 그는 자신의 변화가 두려웠다. 복수를 위해, 딸을 지키기 위해 힘을 갈망했지만, 그 힘이 자신을 인간이 아닌 다른 무언가로 만들고 있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이것이… 아키텍트들이 말하는 관리자의 길인가? 감정을 버리고 오직 시스템의 일부가 되는 것?’ 그는 차가운 명상실 바닥에 앉아 고뇌했다. 그는 복수귀가 되고 싶지도 않았지만, 감정 없는 괴물이 되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있을까?


MI6 지휘 통제실. 부상에서 회복 중인 빅터 할로우는 쏟아지는 보고서들 속에서 신음했다. 전 세계적으로 급증하는 국소적 현실 왜곡 현상. 미디어는 떠들썩했지만, 진실을 아는 그의 등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코바치, 혹은 레이셀. 둘 중 하나, 혹은 둘 모두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젠장, 이대로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어.” 할로우는 이를 악물었다. 코바치의 행방은 여전히 묘연했고, 레이셀의 추종 세력 역시 파악되지 않았다. MI6의 정보망은 한계에 부딪히고 있었다.

바로 그때, 그의 보안 단말기로 최고 등급 암호화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발신지는 불명.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발신자: 익명 / 제목: 코바치의 괴물들]
나는 알렉산더 코바치의 연구원 중 하나다. 그의 미친 계획을 더 이상 묵과할 수 없어 이 정보를 보낸다. 그는 ‘퀀텀 하이브리드’라는 인공 능력자 군대를 만들고 있다. 외계 기술과 불법적인 생체 실험의 끔찍한 결과물이다. 첨부된 데이터는 프로젝트 개요 일부와 비밀 연구 시설 중 하나의 위치 정보다. 부디 이 괴물들이 세상을 삼키기 전에 막아주길 바란다.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다.

메시지에는 암호화된 데이터 패킷이 첨부되어 있었다. 할로우는 즉시 기술팀에 분석을 지시했다. 데이터는 진짜였다. 끔찍한 생체 실험 기록, 불안정한 양자 에너지 패턴, 그리고 알프스 산맥 지하 깊숙한 곳에 위치한 비밀 연구 시설의 좌표.

“함정일 수도 있습니다, 국장님.” 부관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코바치가 일부러 흘린 정보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알고 있다.” 할로우는 굳은 표정으로 첨부된 시설 구조도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확인해 봐야 한다. 코바치가 정말 저런 괴물들을 만들어내고 있다면, 시간이 없어.”

그는 결단을 내렸다. 위험을 감수하고 시설을 급습하기로. 코바치의 계획을 저지하고, 그의 기술과 배후 세력에 대한 정보를 확보해야 했다.

“최정예 타격팀을 소집해. 목표는 알프스 지하 시설. 에단 리브스 박사와 엘라나에게는 자문 역할로 동행을 요청한다. 그들의 지식과 능력이 필요할 거다.” 할로우는 명령을 내렸다. “릴리 리브스는… 이곳에 남긴다. 그녀는 아직 너무 불안정해. 그리고 너무… 위험해.”

작전명 ‘판도라’. 상자를 열어 확인해야 하는 위험한 임무였다. 성공한다면 코바치에게 치명타를 입힐 수 있겠지만, 실패한다면… 상상조차 하기 싫은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할로우는 다가올 전투의 피비린내를 예감하며, 굳게 주먹을 쥐었다. 양자 관측의 대가는 이제 피로 지불해야 할 시점이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