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확정 상태의 선택
제35화
발행일: 2025년 06월 05일
알프스 지하 시설은 이제 완벽한 살육의 현장으로 변모했다. 총성과 비명, 기괴한 에너지 방출음이 뒤섞여 귀를 찢었고, 복도 바닥은 피와 정체 모를 체액, 그리고 부서진 기계 파편으로 흥건했다.
“방어선 유지! 저 괴물들을 막아!” 할로우가 피를 토하며 외쳤지만, 그의 목소리는 절망적인 소음에 묻혔다. MI6 최정예 에코-6는 처참하게 무너지고 있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하이브리드들의 맹공과 미라 웰스가 지휘하는 강화 개체들의 압도적인 힘 앞에, 인간의 용기와 전술은 무력했다.
엘라나는 이를 악물었다. 양자 에너지 억제장은 그녀의 힘을 절반 이하로 약화시켰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번개 같은 움직임으로 하이브리드들의 공격을 피하고, 최소한의 에너지 방출로 적의 약점을 정확히 타격하며 MI6 생존자들을 보호하려 애썼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는 분노와 결의로 불타고 있었다. 저 하이브리드들은 생명이 아닌, 코바치와 미라 웰스의 탐욕이 만들어낸 끔찍한 모조품일 뿐이었다.
에단 역시 필사적이었다. 억제장은 그의 정신 공격 능력을 크게 약화시켰지만, 그의 눈앞에는 올리비아를 앗아간 적들이 있었다. 그는 복수심이라는 검은 불꽃을 태우며 남은 힘을 쥐어짰다. 그의 핏발 선 시선이 미라 웰스에게 고정되었다. 그녀가 이 모든 비극의 또 다른 원흉이었다. 에단은 주변 하이브리드들의 텅 빈 정신에 고통의 파편을 쑤셔 넣으며, 미라 웰스를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가고 있었다. 그의 발걸음은 위태로웠지만, 그 안에 담긴 살의는 섬뜩할 정도로 깊었다.
MI6 본부, 통제실.
릴리는 엘라나가 남긴 특수 감지 장치를 통해 알프스에서 벌어지고 있는 끔찍한 상황을 실시간으로 느끼고 있었다. 아버지의 불안정한 분노의 파동, 엘라나의 위태로운 에너지 신호, 그리고 스러져가는 MI6 요원들의 희미한 생체 신호까지. 모든 것이 그녀의 증폭된 감각 속으로 흘러 들어왔다.
‘안 돼… 아빠가… 엘라나가…’
그녀는 손톱이 살갗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엘라나는 떠나기 전 신신당부했었다. 아직 힘을 완전히 통제할 수 없는 상태에서 섣불리 개입하는 것은 모두를 더 큰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고. 하지만 눈앞에서 소중한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지켜만 볼 수는 없었다.
‘할 수 있어… 아니, 해야만 해.’
릴리의 눈동자가 다시 한번 차갑고 비인간적인 푸른 빛으로 타올랐다. 그녀는 자신의 의식을 알프스 지하 시설, 그 아수라장 속으로 투사했다. 그녀의 눈앞에 세상의 이면, 즉 현실을 구성하는 녹색의 코드 라인과 데이터 스트림이 펼쳐졌다. 그녀는 그 복잡한 정보의 흐름 속에서 ‘확률’이라는 변수를 찾아냈다.
그녀는 자신의 의지를 집중하여, 시설 내부의 확률 분포에 직접 개입하기 시작했다.
하이브리드 하나가 MI6 요원에게 치명타를 날리려는 순간, 그의 발밑 바닥이 갑자기 액체처럼 변하며 그의 발목을 삼켰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릴리가 그 지점의 물질적 안정성 확률을 극단적으로 낮게 ‘관측’했기 때문에 현실이 된 것이다.
미라 웰스가 엘라나를 향해 외계 무기를 발사하는 순간, 무기의 에너지 제어 시스템이 원인 불명의 오류를 일으키며 불발되었다. 릴리가 해당 시스템의 오작동 확률을 ‘선택’한 결과였다.
에단을 향해 달려들던 강화 하이브리드의 내부 동력 코어가 갑자기 과부하를 일으키며 폭발했다. 릴리가 그 코어의 불안정성 확률을 ‘증폭’시킨 탓이었다.
릴리의 개입은 전장의 흐름을 미묘하게 바꾸기 시작했다. MI6에게 불리했던 확률들이 조금씩 유리한 방향으로 기울어졌다. 하지만 대가는 컸다. 그녀가 현실의 코드에 손을 댈수록, 불안정하게 요동치던 그녀 자신의 존재와 주변 공간의 구조 역시 더욱 위태롭게 뒤틀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몸 주변에서 미세한 공간 균열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고, 통제되지 않는 에너지 파동이 의료 시설의 기기들을 오작동시켰다. 그녀는 세상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 시한폭탄이 되어가고 있었다.
바로 그때,
하늘이… 울었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가 본능적인 공포를 느낄 정도의 깊고 불길한 진동이 대기를 타고 흘렀다. 마치 거대한 행성이 바로 옆에서 신음하는 듯한, 혹은 차원 자체가 찢어지는 듯한 이질적인 저주파음이었다.
그리고 밤하늘. 검은 장막이 찢겨 나가며, 인간의 언어로는 형용할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지평선에서 지평선까지, 하늘 전체가 살아있는 듯 꿈틀거리는 거대한 빛의 막으로 뒤덮였다. 그것은 오로라처럼 아름다웠지만, 그 색깔과 움직임은 불안정하고 위협적이었다. 녹색과 보라색, 핏빛 붉은색이 뒤섞인 빛의 파동이 소용돌이치며, 하늘 전체가 거대한 만화경처럼 변모했다. 그 중심부에는 칠흑 같은 ‘구멍’이 뚫려 있었고, 그 구멍 너머에서는 수많은 별들이 기괴하게 왜곡되거나 빨려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마치 우주 자체가 병들어 신음하는 상처처럼.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도시의 불빛 아래서도 선명하게 보이는 이 초현실적인 광경 앞에서, 전 세계가 일순간 숨을 멈췄다. 경이로움보다는 압도적인 공포가 사람들의 심장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저것은 자연 현상이 아니었다. 신의 분노, 혹은 그 이상의 무언가였다.
알프스 지하 시설의 아수라장 속에서도 그 변화는 느껴졌다. 벽과 천장이 미세하게 진동했고, 공기 중의 에너지 파동이 급격하게 변하며 억제장의 효과마저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전투 중이던 MI6 요원들과 코바치의 하이브리드, 심지어 미라 웰스와 엘라나조차 본능적인 위협을 느끼고 잠시 동작을 멈췄다. 엘라나의 얼굴에는 처음으로 경악과 두려움이 스쳐 지나갔다. ‘설마… 벌써…?’
그리고 마침내, 그것이 나타났다.
하늘을 뒤덮은 빛의 소용돌이 중심, 칠흑 같은 구멍 속에서 무언가가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아니, 형태라고 부를 수도 없었다. 그것은 기하학적인 개념 자체를 비웃는 듯한, 끊임없이 변화하고 재구성되는 초차원적인 구조물이었다. 수천, 수만 개의 거대한 눈동자가 서로 얽히고 분열하며 하늘 전체를 뒤덮는 듯했고, 그 눈동자 하나하나에서는 우주의 탄생과 소멸이 동시에 보이는 듯한 심연의 빛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살아있는 존재라기보다는, 우주 법칙 그 자체, 혹은 그 너머의 무언가가 강림한 듯한 압도적인 현현이었다.
에크릴. 아키텍트의 대표자. 우주 관리자의 의지가 마침내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 존재가 내뿜는 순수한 의지의 압력만으로도 지구 전체의 통신 시스템은 맥없이 무너져 내렸다. 모든 화면, 모든 스피커, 모든 전자기기에서 동시에 하나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목소리는 남성도 여성도 아니었으며, 어떤 언어에도 속하지 않았지만, 듣는 이의 뇌리에 직접 새겨지듯 명확하게 전달되었다. 그 안에는 어떠한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오직 차갑고 절대적인 법칙, 그리고 거스를 수 없는 권능만이 느껴졌다. 마치… 거대한 기계가 내리는 최종 판결처럼.
<하등한 유기체, 인류에게 고한다.>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순간, 전 세계 수십억 인구는 마치 심장이 멎는 듯한 충격과 함께 극심한 공포에 사로잡혔다. 어떤 이는 비명을 지르며 거리에 나뒹굴었고, 어떤 이는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었다. 신앙심 깊은 자들은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렸지만, 그들의 신은 침묵했다.
<너희 종족의 무분별한 진화, 특히 ‘의식’을 통한 양자 영역 침범은 이 우주 구역의 안정성을 심각하게 훼손하였다. 시스템 오류 임계점 초과. 이는 용납할 수 없다.>
하늘의 거대한 눈동자들이 일제히 지구 표면을 훑어 내리는 듯, 소름 끼치는 감시의 시선이 느껴졌다. 마치 현미경 아래 놓인 미생물처럼, 인류의 모든 비밀과 약점이 발가벗겨지는 듯한 굴욕적인 감각이었다.
<이에, 아키텍트로서 최종 결정을 하달한다.>
목소리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마치 오래전에 정해진 절차를 집행하듯 냉정했다.
<인류에게 마지막 정화의 기회를 부여한다. 현 시점부로 정확히 지구 표준 시간 48시간. 그 안에 너희 스스로가 초래한 양자적 혼란을 종식시키고, 너희 종족의 위험한 변이(변종 능력자)를 완벽하게 통제하거나 제거하여 시스템 안정성을 회복함을 증명하라.>
48시간. 인류의 명운을 건 시한부 선고였다.
<만약 주어진 시간 내에 정화에 실패한다면…> 목소리는 더욱 차갑고 무겁게 가라앉았다. 하늘의 눈동자들이 일제히 핏빛으로 물들기 시작했고, 지구 전체를 옥죄는 불길한 에너지장이 형성되었다. 그 에너지는 단순한 위협이 아니었다. 행성 전체를 원자 단위로 분해할 수 있는, 상상조차 불가능한 파괴의 힘이었다. <이 행성, 지구(Terra-Sol-3)는 즉시 시스템에서 ‘완전 소거’될 것이다. 너희의 존재 자체가, 너희가 이룩한 모든 것과 함께, 이 우주에서 영원히 지워질 것이다. 어떤 흔적도, 어떤 기록도 남지 않을 것이다.>
완전 소거. 삭제. 격리나 고립 같은 자비는 없었다. 실패의 대가는 오직 존재의 완전한 소멸뿐이었다. 인류라는 종족 자체가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우주의 역사에서 깨끗하게 지워진다는 의미였다.
에크릴의 최후통첩은 자비 없는 선고였다. 그의 현현은 하늘에서 서서히 사라졌지만, 밤하늘을 뒤덮은 핏빛 에너지 막과 지구 전체를 옥죄는 파괴의 기운은 그대로 남았다. 마치 거대한 단두대처럼, 인류의 마지막 48시간을 재고 있는 것 같았다.
알프스 지하 시설의 전투는 잠시 멈춰 있었다. MI6 요원도, 하이브리드도, 심지어 미라 웰스와 엘라나조차 에크릴의 압도적인 강림과 잔혹한 최후통첩 앞에 할 말을 잃었다. 에단은 절망감에 무릎을 꿇었다. 코바치를 향한 복수심조차 이 거대한 우주적 위협 앞에서는 하찮게 느껴졌다.
48시간. 인류의 운명을 결정할 시간이 잔인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 끝에 기다리는 것은 오직 생존 혹은 완전한 소멸뿐이었다. 불확정 상태의 선택은 이제 한 개인이나 집단이 아닌, 인류 전체의 어깨 위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그리고 그 선택의 열쇠는 여전히 혼수상태에 빠진 소녀, 릴리 리브스의 손에 쥐어져 있는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