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자 해부학의 칼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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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25년 06월 06일

에크릴의 최후통첩이 남긴 절대적인 공포와 침묵. 그것은 알프스 지하 시설의 살육전을 잠시 멈춰 세웠다. 핏빛으로 물든 하늘의 잔상과 존재 자체가 지워질 수 있다는 실존적 위협 앞에서, 인간도, 하이브리드도, 외계 존재마저 숨을 죽였다.

하지만 그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미라 웰스였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에는 공포 대신 차가운 계산과, 어쩌면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번득임이 스쳤다. 에크릴의 직접적인 개입과 최후통첩. 이것은 그녀가 속한 세력에게는 예상치 못한 변수이자, 동시에 판도를 뒤흔들 기회일 수도 있었다.

"상황이 바뀌었군." 미라가 얼음처럼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녀는 코바치에게 짧은 암호화 통신을 보내는 동시에, 옆에 도열한 강화 하이브리드들에게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시간이 없다. 저 둘을 무슨 수를 써서든 생포해. 나머지는 처리하고." 에단과 엘라나를 노리는 그녀의 명령이었다.

최후통첩은 코바치에게도 전달되었을 터였다. 그의 야욕은 이제 시간과의 싸움에 직면했다. 48시간 안에 자신의 하이브리드 기술을 완성하거나, 혹은 에단과 엘라나의 능력을 흡수하여 스스로 '해결책'이 되려는 미친 계획을 세웠을지도 모른다.

다시 총성이 울리고 에너지 광선이 작렬하며 전투가 재개되었다. 하지만 이전과는 양상이 달랐다. 미라 웰스는 더 이상 탐색전을 벌이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외계 무기를 망설임 없이 사용하며 엘라나를 집중적으로 공격했고, 강화 하이브리드들은 잔혹할 정도로 효율적인 움직임으로 MI6 생존자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48시간은 에단과 엘라나를 확보하기 위한 마지막 기회였다.

“크윽! 방어선이 무너진다!”

“후퇴하라! 후퇴 루트 확보!”

할로우는 무너져가는 전황 속에서 절망적으로 외쳤다. 이대로라면 전멸이었다. 에단과 엘라나마저 저들의 손에 넘어가면 인류에게 남은 희망은 없었다. 그는 부서진 통제 콘솔을 흘깃 보았다. 그리고 결심했다.

엘라나는 미라 웰스와 격렬하게 맞붙었다. 양자 에너지 억제장은 에크릴의 강림 여파로 불안정해져 간헐적으로 출력이 약해졌지만, 여전히 그녀의 힘을 제약하고 있었다. 미라 웰스의 전투 기술은 엘라나와 동급, 혹은 그 이상으로 보였고, 그녀가 사용하는 무기는 엘라나의 종족에게도 위협적인 이질적인 에너지를 발산했다. 두 외계 존재의 싸움은 주변 공간을 뒤흔들며 파괴적인 에너지 파동을 만들어냈다.

에단은 복수심을 원동력 삼아 미라 웰스에게 접근하려 했지만, 일반 하이브리드들이 끈질기게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는 약화된 정신 공격으로 그들을 괴롭혔지만, 수적 열세를 극복하기는 어려웠다. 그의 눈에 절망이 스치는 순간이었다.

카가가가가강-!

갑자기 시설의 천장이 찢겨 나가며 무언가가 강철 구조물을 뚫고 내려왔다! 잔해와 먼지가 폭풍처럼 쏟아지는 가운데,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은… 레이셀이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광기와 증오가 서려 있었고, 온몸에서는 이전보다 더욱 강력하고 불안정한 에너지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후퇴 후 힘을 회복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금지된 방식으로 자신을 강화시킨 듯 보였다.

"모두… 여기서 죽어라!"

레이셀은 에크릴의 최후통첩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눈앞의 모든 존재를 향해 무차별적인 파괴를 시작했다. 그녀의 공격은 MI6 잔존 병력뿐만 아니라, 미라 웰스와 코바치의 하이브리드, 그리고 엘라나와 에단까지 겨냥했다. 그녀에게는 이 혼란 자체가 모든 적을 한꺼번에 제거하고 자신의 존재 이유를 증명할 기회였다.

전장은 이제 세력 간의 처절한 삼파전, 아니 사파전으로 번져 통제 불능의 아수라장이 되었다. 레이셀의 난입이 상황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엘라나는 미라 웰스와 레이셀, 두 강력한 적 사이에서 고립될 위기에 처했다. 그녀는 에단을 보호하며 필사적으로 싸웠지만, 한계가 명확했다.

에단은 이 난전 속에서 자신을 노리는 하이브리드들과 레이셀의 광폭한 공격을 피해 처절하게 버텼다. 그 과정에서 이미 심각한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바로 그때, 할로우가 움직였다. 그는 남은 에코-6 대원 두 명에게 에단과 엘라나를 엄호하라고 외친 뒤, 자신은 반대 방향, 시설의 심장부인 동력 제어실을 향해 비틀거리며 달려갔다. 그의 눈빛에는 마지막 결의가 담겨 있었다.

"국장님! 어디 가십니까!" 부관이 외쳤지만, 할로우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수많은 하이브리드와 레이셀의 공격 파편을 뚫고 동력 제어실 문을 강제로 열었다. 내부에는 거대한 에너지 코어가 불안정한 빛을 내며 회전하고 있었다. 그는 비틀거리며 제어판으로 다가가, 보안 코드를 무시하고 과부하 시퀀스를 강제로 입력하기 시작했다.

"이 시설과… 저 괴물들을… 모두 지옥으로 보내주마." 할로우는 피 묻은 손으로 마지막 버튼을 눌렀다.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조국을 위해, 그리고 어쩌면… 인류를 위해. "행운을 빈다, 리브스."

경고! 동력 코어 임계점 돌파! 즉시 폭발 위험! 전원 대피하라!

시설 전체에 찢어지는 듯한 경고음이 울려 퍼졌다. 에너지 코어에서 흘러나오는 빛이 격렬해지며 주변의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 팽창하기 시작했다.

미라 웰스와 레이셀조차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그들은 생포 혹은 파괴 대상이었던 에단과 엘라나를 잠시 잊고, 폭발에서 살아남기 위해 각자의 방식으로 탈출을 준비했다.

할로우의 희생적인 폭발은 거대한 연쇄 반응을 일으켰다. 폭발의 강력한 에너지 파동은 불안정했던 양자 에너지 억제장을 완전히 파괴했고, 동시에 릴리가 이전의 개입으로 만들어냈던 미세한 차원 균열들을 불안정하게 확장시키는 부작용을 낳았다.

시설 벽면 곳곳에서 공간 자체가 찢어지는 듯한 균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너머에서는 기괴한 색깔과 형태의 다른 차원의 풍경이 언뜻 보였고, 정체 모를 에너지와 비명 소리가 흘러나오는 듯했다.

지옥의 문이, 열리고 있었다. 할로우의 희생은 생존자들에게 탈출의 기회를 주는 동시에, 세상을 더 큰 혼돈 속으로 밀어 넣는 판도라의 상자를 완전히 열어젖힌 셈이었다. 폭발의 섬광 속에서, 모든 것이 하얗게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