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열된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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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25년 06월 07일

지축을 뒤흔드는 굉음과 함께 알프스 지하 시설은 완전히 붕괴했다. 할로우의 마지막 불꽃은 코바치의 비밀 연구소를 거대한 무덤으로 만들었지만, 그 대가는 끔찍했다. 폭발의 여파는 단순한 물리적 파괴를 넘어, 릴리가 불안정하게 열어 놓았던 차원의 미세한 상처들을 찢어발겨 놓았다.

시설의 잔해 속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새로운 지옥을 목격했다. 공간 자체가 비명을 지르며 찢어지고 있었다. 허공에 나타난 불규칙한 균열들은 마치 썩은 상처처럼 검붉은 빛을 내며 꿈틀거렸고, 그 너머에서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닌 풍경들이 언뜻 비쳤다. 기괴한 색채의 하늘, 뒤틀린 기하학적 구조물, 그리고… 형언할 수 없는 형태의 무언가들이 꿈틀거리는 모습.

균열은 단순히 다른 공간을 보여주는 창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터져 버린 둑이었다. 균열 너머에서 이질적인 에너지 파동이 흘러나와 주변의 물리 법칙을 뒤흔들었다. 중력이 멋대로 강해지거나 약해지고, 시간이 불규칙하게 늘어지거나 빨라졌다. 어떤 균열에서는 섬뜩한 촉수 같은 것이 뻗어 나와 허공을 휘젓거나, 이해할 수 없는 언어의 속삭임 같은 소리가 흘러나오기도 했다.

“맙소사… 이게 대체…” 살아남은 MI6 요원 중 하나가 공포에 질려 중얼거렸다.

엘라나는 부상당한 몸을 이끌고 이 끔찍한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경악과 함께 깊은 책임감이 어려 있었다. 이것은 릴리의 힘이 폭주한 결과이자, 자신들이 우주의 균형을 건드린 대가였다. 그리고 이 현상은 이곳 알프스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증폭된 감각은 전 지구적인 차원에서 동일한, 혹은 유사한 차원 균열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고 있음을 감지했다.

전 세계는 대혼란에 빠졌다.

런던 트라팔가 광장 상공에 거대한 보랏빛 균열이 열리며, 주변 건물의 유리창을 모조리 박살 내는 초음파를 쏟아냈다. 도쿄 시부야 교차로에서는 땅이 젤리처럼 출렁이며 사람들이 공중으로 튕겨 나갔다. 뉴욕 타임스퀘어 빌딩 표면에는 수많은 눈동자 형상이 나타나 사람들을 미치게 만들었다. 카이로의 피라미드 위에서는 모래 폭풍 대신 기괴한 녹색 에너지가 회오리쳤다.

각국 정부는 비상사태를 선포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군대와 경찰은 정체 모를 위협 앞에서 무력했고, 과학자들은 눈앞의 현상을 설명할 이론조차 갖지 못했다. 통신망은 마비되었고, 금융 시스템은 붕괴했으며, 도시는 공포에 질린 사람들의 비명과 약탈, 폭동으로 아비규환이 되었다. 에크릴의 최후통첩 48시간은 이제 인류 문명 자체의 붕괴 카운트다운처럼 느껴졌다.


MI6 본부 의료 시설.

릴리는 침대에 누운 채 가늘게 떨고 있었다. 그녀의 증폭된 의식은 전 세계에서 벌어지는 혼란과 고통을 여과 없이 느끼고 있었다. 자신이 저지른 일의 결과였다. 아버지를, 엘라나를 구하기 위해 사용했던 힘이 세상을 파괴하는 방아쇠가 되어버린 것이다. 엄청난 죄책감과 함께, 그녀 안의 통제되지 않는 힘이 다시 들끓기 시작했다. 그녀는 괴로움에 신음하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힘을 통제하지 못하면, 자신이 바로 이 재앙의 근원이 될 수도 있었다.

에단은 부상당한 몸을 이끌고 시설 내부의 모니터들을 통해 전 세계의 참상을 지켜보았다. 딸을 구출하려던 그의 행동이 이런 결과를 낳았다는 사실에 그는 망연자실했다. 하지만 그의 슬픔과 죄책감은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나타났다. 그의 의식은 힘의 사용으로 인해 점점 더 비인간적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는 이 혼란 속에서도 냉정하게 상황을 분석하고, 최악의 시나리오를 계산하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복수심과 함께, 이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한다는 차가운 결의로 빛나기 시작했다.


혼돈은 누군가에게는 위기지만, 누군가에게는 기회였다.

알프스 시설의 폭발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레이셀은 이 전 지구적인 혼란을 기회로 삼았다. 그녀는 은신처에서 더욱 강력한 파괴 에너지를 방출하며 차원 균열을 불안정하게 만들고, 균열 너머의 위험한 존재들을 지구로 유인하려 했다. 그녀의 목표는 단순한 복수를 넘어, 인류 문명의 완전한 파괴와 혼돈의 확산이었다.

코바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미라 웰스의 잔존 세력과 함께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여, 새롭게 열린 차원 균열에서 흘러나오는 미지의 에너지를 탐욕스럽게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 에너지를 이용하여 자신의 하이브리드들을 더욱 강력하게 만들고, 어쩌면 자신마저 신과 같은 존재로 진화시킬 수 있으리라 믿었다. 지구의 혼란은 그의 미친 야망을 위한 새로운 자양분일 뿐이었다.

엘라나는 이 모든 상황 속에서 필사적이었다. 그녀는 부상당한 몸으로 릴리를 보호하고 그녀의 폭주하는 힘을 안정시키려 애쓰는 동시에, 확장되는 차원 균열을 막을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녀는 마지막 희망을 걸고, 자신의 모든 정신력을 집중하여 에크릴에게 다시 한번 교신을 시도했다. 이번에는 단순한 보고나 요청이 아니었다. 그녀의 존재 자체를 건, 간절한 호소였다.

“에크릴 님. 아키텍트의 의지시여.” 그녀의 정신적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지만, 그 안에는 이전에는 없었던 강한 감정의 파동이 실려 있었다. 연민, 슬픔, 그리고… 뜻밖에도 희망이었다.

“저는… 당신의 명령에 따라 이 미숙하고 위험한 종족, 인류를 감시해왔습니다. 그들의 무모함, 파괴적인 잠재력, 시스템을 위협하는 불안정성… 모두 사실입니다. 당신의 판단은 논리적으로는 옳습니다.”

엘라나는 잠시 숨을 골랐다. 그녀의 눈앞에 에단의 처절한 부성애, 올리비아의 희생적인 용기, 그리고 릴리가 가진 상처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빛나는 강인함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저는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을 보았습니다. 이 하등하다고 여겨졌던 유기체들이 가진… 이해할 수 없는 힘을요.” 그녀의 목소리에 열기가 더해졌다. “그것은 양자역학이나 기술 발전이 아닙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희생입니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찾으려는 의지입니다. 그들은 불완전하기에 서로에게 의지하고, 유한하기에 찰나의 순간을 소중히 여기며, 죽음 앞에서조차 타인을 위해 자신을 내던질 수 있는 존재들입니다.”

그녀는 에단의 광기 어린 복수심 이면에 숨겨진 깊은 슬픔을, 릴리의 차가운 힘 아래 꿈틀거리는 인간적인 고뇌를 떠올렸다.

“그들의 ‘의식’이 시스템을 불안정하게 만든다면, 그 불안정성 속에는 파괴뿐 아니라 창조의 가능성 또한 존재합니다. 그들의 감정, 그들의 유대감, 그것이 만들어내는 예측 불가능한 변수야말로 어쩌면 이 정체된 우주 시스템에 필요한 새로운 진화의 동력일지도 모릅니다.” 엘라나는 거의 외치듯 호소했다. 이것은 그녀의 종족에 대한 명백한 반역과도 같은 발언이었다.

“그러니 제발… 에크릴 님. 48시간의 선고를 거두어 주십시오. 이 혼란은 그들의 잘못만이 아닙니다. 우리 관리자들의 미숙함, 레이셀의 잔혹함, 그리고 당신의 침묵이 초래한 결과이기도 합니다. 저에게… 아니, 인류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십시오. 제가 그들의 잠재력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고,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음을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제가 이 종족의 편에 서서, 모든 책임을 지겠습니다!”

엘라나는 자신의 모든 의지를 담아 마지막 간청을 보냈다. 그녀는 에크릴의 냉혹한 논리에 감정이라는 변수를 던졌다. 그것이 통할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 역시 인간들에게서 무언가를 배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에크릴의 의식은 여전히 침묵했다. 하늘을 뒤덮은 핏빛 에너지 막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고, 파괴의 기운은 더욱 짙어질 뿐이었다. 48시간의 모래시계는 잔인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엘라나의 간절한 호소는 거대한 침묵 속에 공허하게 메아리칠 뿐이었다.

지구는 이제 안팎의 위협으로 인해 붕괴 직전에 놓여 있었다. 차원 균열은 점점 더 넓어지고 있었고, 그 너머의 심연은 인류를 삼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엘라나는 침묵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이제 기댈 곳은 오직 자신과 남겨진 인간들뿐임을 깨달았다. 생존을 위한 처절한 싸움이, 이제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