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의 격돌
제38화
발행일: 2025년 06월 08일
시간은 핏물처럼 흘러내렸다. 48시간. 인류의 목에 걸린 단두대의 칼날이 서서히 내려오고 있었다. 하늘을 뒤덮은 핏빛 에너지 막은 불길한 조명처럼 세상을 비추었고, 도시 곳곳에서 찢어진 공간의 상처, 차원 균열은 암세포처럼 번져나가며 이질적인 공포를 토해냈다.
MI6 극비 의료 시설 역시 안전하지 않았다. 건물 외벽 가까이에서 새로운 균열이 불안정하게 꿈틀거리며 주변 공간을 뒤틀고 있었다.
“코바치… 그 자식이 이 혼란을 이용하고 있어.”
에단은 의료 시설의 통제실 모니터를 응시하며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부상당한 몸은 여전히 고통을 호소했지만, 그의 정신은 차갑게 날이 서 있었다. 엘라나가 제공한 정보와 자신의 양자 감응 능력으로, 그는 코바치가 런던 시내 한복판, 새로 열린 거대한 차원 균열 근처의 빌딩 최상층에서 미지의 에너지를 흡수하며 무언가를 꾸미고 있음을 감지했다. 그는 올리비아의 복수를 해야 했다. 그리고 인류를 더 깊은 나락으로 밀어 넣으려는 코바치의 야욕을 막아야 했다.
“내가 가겠소.” 에단이 결연하게 말했다.
“에단, 당신 몸 상태로는…” 엘라나가 그를 만류하려 했지만, 에단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 깊은 곳에는 인간적인 감정 대신,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차가운 기계의 논리 같은 것이 자리 잡고 있었다.
“물리적인 싸움이 아니야.” 에단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 손으로 올리비아를 지키지 못했다. 이고르에게 가했던 잔인한 폭력의 기억은 여전히 생생했지만, 그의 최후는 릴리의 손에 의해 마무리되었다. 그 사실이 에단의 복수심을 조금도 누그러뜨리지는 못했다. 오히려 코바치를 향한 증오를 더욱 명확하게 만들었다. “내 방식대로 끝낼 거요. 그놈의 정신 속에서.”
런던 중심부, 거대한 차원 균열이 하늘을 찢고 있는 바로 아래. 코바치는 초고층 빌딩의 통유리 너머로 아비규환이 된 도시를 내려다보며 광기 어린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균열에서 흘러나오는 이질적인 에너지가 소용돌이치며 그의 몸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의 피부는 창백하게 빛났고, 눈동자는 인간의 것이 아닌 듯한 푸른색으로 타올랐다. 그는 자신을 신으로 만들 힘을 마침내 손에 넣고 있었다.
“더… 더 강한 힘을…”
그의 주변에는 미라 웰스의 잔존 병력과, 균열 에너지를 흡수하여 더욱 기괴하고 강력하게 변이된 퀀텀 하이브리드들이 도열해 있었다. 그들은 코바치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파괴의 꼭두각시였다.
바로 그때, 코바치의 미간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그의 강화된 감각이 불청객의 접근을 감지했다. 물리적인 침입이 아니었다. 훨씬 더 교묘하고 깊숙한 곳에서 파고드는… 의식의 침입.
에단 리브스.
코바치는 비웃음을 터뜨렸다. “감히 내 정신에 도전하겠다고? 어리석은 놈.”
에단의 의식은 분노와 복수심이라는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코바치의 정신 방벽을 꿰뚫으려 했다. 그는 물리적인 힘이 아닌, 순수한 양자 감응 능력으로 코바치의 의식을 직접 공격했다. 마치 악몽을 현실로 렌더링하듯 그의 가장 깊은 트라우마, 숨겨진 공포, 탐욕스러운 야망의 기억들을 끄집어내어 왜곡하고 증폭시키려 했다.
코바치의 정신 속에서, 어린 시절의 비참했던 기억, 권력자들에게 짓밟혔던 굴욕, 불멸에 대한 끔찍한 집착들이 뒤섞여 그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에단은 이 혼란의 틈을 놓치지 않고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예상치 못한 기억의 편린을 발견했다.
차가운 실험실. 코바치는 젊고 야심만만한 사업가였다. 그리고 그의 앞에 서 있는 것은 지금보다 훨씬 냉정하고 이질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미라 웰스였다. 그녀는 인간의 모습이었지만, 그 눈빛은 고대의 지혜와 무자비함을 동시에 담고 있었다.
"당신에게… 힘을 주지. 당신 종족이 가늠할 수 없는 기술과 지식을." 미라의 목소리는 매혹적이었지만, 그 이면에는 차가운 거래의 조건이 숨겨져 있었다. "그 대가로… 이 행성, 지구가 필요하다. 우리 종족의 오랜 적, 에크릴과 그의 관리 시스템을 파괴할 발판으로.
코바치의 눈빛이 탐욕으로 번뜩였다. 그는 망설임 없이 거래를 받아들였다. 인류의 미래? 그에게는 오직 자신의 영원한 지배만이 중요했다.
에단은 이 단편적인 기억의 교환에 잠시 숨을 멈췄다. 코바치와 미라 웰스. 그들의 결탁은 단순한 협력이 아니었다. 지구와 인류 전체를 제물로 바치는, 끔찍한 배신의 계약이었다. 미라 웰스의 세력은 에크릴의 적대 세력이었던 것이다.
이 충격적인 정보는 에단의 분노를 더욱 증폭시켰다. 그는 코바치의 정신 방벽을 더욱 거세게 공격했다. 하이브리드들을 통제하는 그의 정신 연결망이 크게 흔들렸다. 몇몇 하이브리드들이 명령 체계 혼란으로 서로를 공격하거나 자해하기 시작했다.
“크아악…!” 코바치는 격렬한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감쌌다. 하지만 그는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차원 균열에서 흡수한 막대한 에너지가 그의 정신 방벽을 필사적으로 복구하고 강화시켰다. “네놈의 하찮은 정신 공격 따위… 이 새로운 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감히 내 기억을 엿봐? 대가를 치르게 해주마!”
코바치는 강화된 하이브리드들에게 명령을 내려 에단이 숨어있는 MI6 시설을 공격하도록 지시하는 동시에, 자신의 강력해진 의식으로 에단의 정신을 역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올리비아의 죽음, 릴리의 고통, 에단 자신의 죄책감을 후벼 파는 잔인한 반격이었다. 보이지 않는 전장에서 두 남자의 처절한 의식의 격돌이 벌어졌다. 에단은 이제 코바치의 야욕뿐만 아니라, 그 배후에 도사린 더 거대한 위협의 실체까지 마주하게 된 것이다.
한편, 런던 상공의 또 다른 곳.
찢겨진 하늘 아래, 엘라나와 레이셀의 숙명적인 대결이 다시 펼쳐지고 있었다. 레이셀은 더욱 강력해진 파괴 에너지로 엘라나를 몰아붙였다. 그녀의 공격은 공간 자체를 베어 가르거나 시간을 뒤트는 듯, 아키텍트 본연의 힘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아직도 저 버러지들을 감싸는 건가, 엘라나! 네 어리석음이 이 모든 혼란을 초래했다! 에크릴 님께서 저들을 ‘삭제’하기 전에, 내 손으로 네 숨통을 끊어주마!” 레이셀의 외침에는 광기와 증오가 서려 있었다.
엘라나는 필사적으로 맞섰다. 그녀의 힘은 레이셀보다 약했지만, 그녀의 눈빛에는 흔들림 없는 결의가 있었다. 인류를 보호하겠다는 선택. 그것은 단순한 변덕이나 동정이 아니었다. 그녀가 믿는 새로운 가능성이었다.
“너는 틀렸어, 레이셀! 파괴가 아닌… 이해와 공존이야말로 진정한 질서다!”
두 고대 존재의 싸움은 주변 차원의 구조까지 뒤흔들 정도로 격렬했다. 그들의 격돌 지점 주변에서는 공간이 유리처럼 깨져나가고, 시간이 불규칙하게 흐르는 등, 현실 자체가 불안정하게 요동쳤다. 마치 신들의 전쟁 같았다.
MI6 의료 시설, 릴리의 병실.
릴리는 여전히 혼수상태였지만, 그녀의 내면에서는 거대한 폭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아버지의 고통스러운 의식 전투, 엘라나의 위태로운 싸움, 그리고 전 세계를 삼키는 차원 균열의 비명 소리. 모든 것이 그녀의 증폭된 감각 속으로 흘러 들어와 그녀를 찢어 놓을 듯했다.
그녀는 이 혼란을 잠재워야 했다. 자신의 힘을 통제하고, 저 찢겨진 현실의 상처, 차원 균열을 닫아야만 했다. 하지만 어떻게? 그녀는 아직 자신의 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엄마…’
그녀는 필사적으로 의식을 집중했다. 혼돈 속에서 다시 한번 어머니, 사만다의 의식 파편을 찾아 헤맸다. 길을 알려줄 등대, 힘을 제어할 열쇠를 얻기 위해. 그녀의 간절한 부름에 응답하듯, 양자 거품의 심연 속에서 희미한 빛이 다시 깜빡이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사랑과 지혜가 담긴 속삭임이 그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세 개의 전장. 의식 속에서 벌어지는 에단과 코바치의 사투. 하늘 위에서 펼쳐지는 엘라나와 레이셀의 숙명적인 대결. 그리고 내면의 혼돈과 싸우며 세상을 구원할 방법을 찾아 헤매는 릴리. 48시간의 모래시계는 계속해서 떨어지고 있었고, 인류의 운명은 이 세 개의 격돌에 달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