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측자와 피관측자의 계약
제39화
발행일: 2025년 06월 09일
릴리의 간절한 부름은 마침내 양자 거품의 심연을 갈랐다. 혼돈과 정보의 폭풍 속에서, 어머니 사만다의 의식 파편이 이전보다 훨씬 더 선명하고 강렬한 빛으로 그녀 앞에 나타났다. 그것은 더 이상 희미한 잔향이 아니었다. 릴리의 각성한 힘과 공명하여, 사만다의 의식은 일시적으로 더 높은 수준의 정보 구조를 회복한 듯 보였다.
‘릴리… 시간이 없어…’ 어머니의 목소리는 이제 슬픔과 그리움뿐만 아니라, 명확한 정보와 다급한 의지를 담고 있었다. ‘들어라, 내 딸. 네게 모든 것을 전해야 한다.’
사만다의 의식은 릴리에게 충격적인 진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녀는 단순한 물리학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오래전, 온건파 외계 존재와 비밀리에 접촉했었다. 이들은 엘라나나 레이셀과는 다른 분파이거나 별개의 고대 종족이었다. 그들은 우주의 균형과 아키텍트 에크릴 종족의 관리 시스템이 가진 한계에 대해 경고했다. 그리고 어쩌면 그 시스템 외부에서 다가오는 더 큰 우주적 위협에 대해서도 알렸는데, 미라 웰스의 세력이 그 일부일 수도 있었다. 그들은 이러한 위협들에 맞서기 위해 사만다에게 협력을 구했던 것이다.
‘그들은 인류의 잠재력, 특히 ‘의식’의 힘이 우주의 미래를 바꿀 열쇠라고 믿었어. 하지만 동시에 가장 큰 위험 요소라고도 했지.’ 사만다의 이미지가 릴리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녀의 눈빛은 슬프지만 강인했다. ‘네 능력은 단순한 돌연변이가 아니야, 릴리. 내가 널 임신했을 때… 그들이 네 안의 잠재력이 안전하게 발현되고 제어될 수 있도록 미세한 ‘양자적 각인’을 시술했단다. 일종의… 안전장치이자 안내 시스템이었지.’
이것이 릴리가 가진 힘의 진짜 기원이었다. 그리고 레이셀이 사만다를 제거해야만 했던 결정적인 이유였다. 사만다는 단순한 위협 인지자가 아니라, 인류와 온건파 외계 세력 사이의 연결고리이자, 릴리라는 잠재적 ‘무기’의 보호자였던 것이다.
‘레이셀은 이 사실을 알아챘고… 나를 제거했지. 하지만 각인은 이미 완료된 후였어. 네 안에는… 우주의 균형을 바로잡을 힘이 잠들어 있단다.’ 사만다의 의식은 릴리에게 그 힘을 제어하고 사용하는 방법의 단서를 전달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기술적인 매뉴얼이 아니라, 감정과 의지, 그리고 우주적 공감에 기반한 심오한 원리였다. ‘힘은… 파괴가 아닌 조화를 위해 써야 해. 분노가 아닌 사랑으로… 확률을 선택해야 한단다. 그것이 네 아버지와 나, 그리고 엘라나가 믿는 길이야…’
어머니의 마지막 가르침과 함께, 사만다의 의식은 다시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가 남긴 정보와 사랑은 릴리의 혼란스러운 내면에 강력한 빛을 밝혔다. 그녀는 자신의 존재와 능력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함께, 인류와 우주의 미래를 짊어져야 하는 막중한 책임감을 깨달았다. 그녀의 눈동자에서 차가운 빛이 서서히 걷히고, 슬픔과 결의가 뒤섞인 인간적인 온기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제 힘을 제어할 방법을 알았다.
한편, 에단의 의식 전투는 극한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는 코바치의 정신 방벽을 거의 무너뜨리는 데 성공했지만, 그 대가는 끔찍했다. 코바치의 기억 속에서 엿본 미라 웰스와의 끔찍한 거래, 그리고 코바치가 뿜어내는 순수한 악의와 탐욕에 노출되면서, 에단의 인간적인 감정과 기억들이 급격히 침식되고 있었다.
그는 올리비아의 얼굴을 떠올리려 애썼지만, 이제는 희미한 윤곽과 슬픔이라는 감정의 잔향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사만다와의 행복했던 기억 역시 빛바랜 사진처럼 멀어져 가고 있었다. 힘을 얻는 대가로, 그는 에단 리브스라는 한 인간의 정체성을 잃어가고 있었다.
‘안 돼… 이렇게 될 수는 없어…’ 절망감이 그의 의식을 잠식하려 할 때, 아주 희미하지만 따뜻한 파동이 그의 내면을 어루만졌다. 릴리. 혼수상태에서 깨어나고 있는 딸의 의식이었다. 그녀의 존재 자체가, 그가 인간성을 완전히 놓아버리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마지막 닻이었다. 그는 딸을 위해, 세상을 위해 이 싸움을 끝내야 했다. 그것은 인간 ‘에단 리브스’로서 해야할 일이었다.
런던 상공의 격전. 엘라나는 마침내 레이셀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는 데 성공했다. 레이셀의 강화된 힘은 강력했지만, 광기와 증오에 사로잡혀 빈틈이 많았다. 엘라나는 자신의 몸이 부서지는 것을 감수하며 레이셀의 에너지 코어에 강력한 역공을 가했다.
“크아아악!” 레이셀은 비명을 지르며 하늘 아래로 추락했다. 그녀의 몸에서는 검은 연기와 불안정한 에너지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완전히 소멸하지는 않았지만, 심각한 손상을 입고 전투 불능 상태가 된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추락하는 와중에도 엘라나를 향해 증오 서린 저주를 퍼부으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엘라나 역시 힘을 거의 소진한 상태였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지상으로 하강했다. 그녀의 몸 곳곳에는 심각한 균열이 가 있었고, 푸른 에너지 빛은 금방이라도 꺼질 듯 희미했다. 그녀는 인류를 위한 자신의 선택에 후회는 없었지만, 이제 그녀에게 남은 시간은 얼마 없어 보였다.
세 개의 전장에서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었다. 릴리는 힘을 제어할 실마리를 찾았고, 에단은 인간성을 잃어가는 절망 속에서도 마지막 투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엘라나는 숙적 레이셀을 물리쳤지만, 자신 역시 소멸 직전에 놓였다. 인류의 운명을 건 48시간의 카운트다운은 계속되고 있었고, 이제 마지막 결전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남은 것은 코바치와의 최후의 대결, 그리고 릴리가 깨어난 힘으로 이 균열된 현실을 봉합하는 것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