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뢰딩거의 눈물
제40화
발행일: 2025년 06월 10일
시간의 모래알은 잔인하게 흘러내렸다. 48시간. 그중 절반 이상이 이미 지옥 같은 혼란과 전투 속에서 소진되었다. 런던 상공을 뒤덮었던 핏빛 에너지 막은 더욱 짙어져, 마치 거대한 단두대의 칼날처럼 인류의 목을 죄어왔다. 도시 곳곳의 차원 균열은 여전히 흉터처럼 남아 세상을 병들게 했고, 사람들은 절망과 공포 속에서 마지막 남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바로 그때, 에크릴의 의지가 다시 한번 지구 전체를 뒤덮었다. 이번에는 하늘을 찢는 현현 없이, 오직 차갑고 절대적인 목소리만이 전 세계의 모든 통신망과 사람들의 의식 속에 직접 울려 퍼졌다.
<시간이 거의 다 되었다, 하등한 유기체들아. 너희의 자정 노력은 미미하고, 시스템 불안정성은 여전히 임계점을 넘어선 상태다.>
목소리에는 일말의 동정이나 자비도 없었다. 오직 기계적인 평가와 냉혹한 선고만이 담겨 있었다.
<아키텍트로서 최종 결정을 내렸다. 인류 문명은 시스템 안정화를 위한 필수 불가결한 희생으로 규정한다. 정화 실패. 행성 지구(Terra-Sol-3)에 대한 ‘완전 소거’ 프로토콜을 예정대로 집행한다.>
선고는 내려졌다. 하늘을 뒤덮은 핏빛 에너지 막이 격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 안에서 응축되는 파괴적인 에너지는 행성 전체를 단 한 번의 파동으로 원자 단위까지 분해하고도 남을 정도였다. 지구 최후의 순간이 임박한 것이다.
“안 돼… 아직 시간이…!”
NASA의 긴급 대책 본부. 제이크 허드슨은 절망적인 표정으로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그는 지난 하루 동안 미국 정부와 국제 사회를 설득하여 외계 위협에 대한 공동 대응팀을 구성하려 필사적으로 노력했지만, 각국의 이해관계와 불신, 그리고 압도적인 공포 앞에서 그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었다. 이제 와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인류의 마지막을 무력하게 지켜볼 뿐이었다.
MI6 극비 의료 시설.
엘라나는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내며 에크릴의 의식을 향해 필사적으로 외쳤다. 그녀의 몸은 거의 반투명하게 변해가고 있었고, 존재 자체가 희미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정신적 목소리에는 꺼지지 않는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에크릴 님! 제발 재고해주십시오!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릴리 리브스… 그녀가 깨어나고 있습니다! 그녀에게는 모든 것을 바로잡을 힘이 있습니다! 제가 증명하겠습니다! 제가 모든 책임을 지고 인류의 가능성을…”
<너의 희생적 변론은 감지되었다, 엘라나. 하지만 시스템의 안정성이 최우선이다. 너의 변절 행위는 규약에 따라 처리될 것이다. 이제 그만 침묵하라.>
에크릴의 의지는 단호했다. 엘라나의 간절한 호소는 차갑게 묵살되었다. 그녀의 희미해져 가는 의식 속으로, 종족에 대한 배신자로서 받게 될 엄중한 처벌의 예고만이 차갑게 새겨졌다. 절망감이 그녀를 덮쳤지만, 그녀는 마지막 순간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남은 모든 에너지 파동을 모아, 막 깨어나려는 릴리의 의식 속으로 흘려보냈다. 마지막 조언이자, 축복이었다. ‘릴리… 너를 믿는다…’
의료 캡슐 안. 릴리의 눈꺼풀이 마침내 완전히 들어 올려졌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는 더 이상 혼란스럽지 않았다. 어머니의 마지막 가르침과 엘라나의 희생적인 격려가 그녀 안의 폭풍을 잠재우고, 힘을 제어할 길을 열어주었다. 그녀는 모든 것을 이해했다. 우주의 비밀, 자신의 능력, 그리고 인류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잔혹한 현실까지도.
그녀는 의료 캡슐의 강화 유리를 마치 종잇장처럼 가볍게 밀어내고 바닥에 내려섰다. 그녀의 몸에서는 더 이상 불안정한 양자 요동이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고요하지만 강력한, 마치 블랙홀처럼 모든 것을 끌어당기는 듯한 압도적인 존재감이 흘러나왔다.
에단은 깨어난 딸의 모습에 숨을 삼켰다. 그녀는 분명 릴리였지만, 동시에 릴리가 아니었다. 그녀의 눈빛은 우주의 심연을 담은 듯 깊었고, 그 안에는 슬픔과 결의, 그리고… 인간을 넘어선 존재의 고독함이 서려 있었다.
“아빠.” 릴리가 에단을 향해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세상을 짊어진 자의 무게가 담겨 있었다. “시간이 없어요. 코바치를 막아야 해요. 그리고… 저 하늘을 닫아야 해요.”
에단은 딸의 변화를 받아들여야 했다. 그녀는 더 이상 보호해야 할 어린 소녀가 아니었다. 어쩌면 인류의 마지막 희망, 혹은… 새로운 신일지도 몰랐다. 그는 코바치와의 의식 전투에서 얻은 정보 – 미라 웰스의 배후와 코바치의 최종 목표 – 를 릴리에게 전달했다.
릴리는 아버지의 말을 조용히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그녀의 증폭된 감각은 코바치가 런던 시내의 차원 균열 에너지를 이용해 무엇을 하려 하는지 파악하고 있었다. 그녀는 눈을 감고 잠시 의식을 집중했다. 그녀의 양자 파동이 미세하게 변화하며 시공간을 넘어 어딘가로 연결되는 듯했다.
런던 상공 어딘가, 추락하며 소멸해가던 엘라나의 희미한 의식 속으로 따뜻하고 강력한 파동이 흘러 들어왔다. 릴리였다.
<엘라나… 들리나요?> 릴리의 정신적 목소리가 엘라나의 의식에 직접 울렸다.
엘라나는 마지막 남은 힘으로 응답했다. <릴리… 깨어났구나… 하지만 나는… 이제…> 그녀의 의식은 금방이라도 꺼질 듯 희미했다.
<아직 아니에요. 당신의 역할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릴리의 의식은 엘라나의 소멸해가는 존재를 부드럽게 감쌌다. 마치 양자 얽힘처럼, 릴리의 안정된 에너지가 엘라나에게 흘러 들어가 그녀의 소멸 속도를 늦추기 시작했다. 완전한 회복은 불가능했지만, 마지막 순간을 잠시 유예시킨 것이다. <당신은 증인이 되어야 해요. 인류의 가능성을, 우리의 선택을.>
<하지만… 에크릴 님은… 이미 결정을…> 엘라나의 의식에 절망감이 스쳤다.
<결정은 바뀔 수 있어요. 우리가 증명한다면.> 릴리의 목소리에는 흔들림 없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릴리는 다시 눈을 뜨고 에단을 바라보았다. “제가 가야 해요.”
“혼자서는 안 된다!” 에단이 반사적으로 외쳤다. 그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딸을 지키려는 아버지의 본능이 남아 있었다.
릴리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아주 오랜만에 보는, 인간적인 표정이었다. “혼자가 아니에요, 아빠. 아빠도 함께 가셔야 해요. 우리의 의식은… 연결되어야 해요. 코바치를 막고, 저 하늘의 관리자에게 보여줘야 하니까요.”
그녀의 시선이 허공을 향했다. 마치 소멸해가는 엘라나의 의식을 느끼는 것처럼. “그리고 엘라나도… 우리와 함께 할 거예요. 그녀의 마지막 증언이 필요해요.”
최후통첩의 압박 속에서, 새로운 결의가 피어나고 있었다. 에단과 릴리. 아버지와 딸. 그리고 멀리서 희미한 의식으로 함께하는 엘라나. 이 기묘하고 불안정한 삼인조는 이제 인류의 운명을 걸고 마지막 싸움을 향해 나아가야 했다. 코바치의 광기를 막고, 에크릴의 파괴적인 선고를 뒤집기 위해. 그들에게 남은 시간은 단 몇 시간뿐이었다.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인류의 운명은 이제 관측될 때까지 생존과 소멸의 중첩 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관측의 방아쇠는, 이제 막 깨어난 소녀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