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의 관측 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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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25년 06월 11일

시간은 이제 시간 단위가 아닌, 분 단위로 끊어지고 있었다. 하늘을 뒤덮은 핏빛 에너지 막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 불안정하게 요동쳤고, 지상은 차원 균열에서 흘러나온 이질적인 존재들과 공포에 질린 인간들의 아비규환으로 가득 찼다. 인류의 마지막 시간이 빠르게 소진되고 있었다.

MI6 극비 시설의 파괴된 격납고. 에단과 릴리는 서로의 눈을 마주 보았다. 아버지와 딸. 하지만 이제 그들의 관계는 그 이상이었다. 인류의 운명을 짊어진 동반자이자, 어쩌면 하나의 의식으로 연결될 존재들이었다.

“준비됐어요, 아빠?” 릴리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강철 같은 결의가 서려 있었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는 우주의 심연처럼 깊고 고요했다.

에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빛 역시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딸을 지키고 복수를 이루겠다는 개인적인 감정은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이제 그것은 인류 전체를 구원해야 한다는 더 큰 사명감 아래 통합되었다. 엘라나에게 배운 수련법과 극한의 경험은 그의 양자 감응 능력을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하게 만들었다. 그는 이제 자신의 의식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집중할 수 있었다.

“가자.”

두 사람의 의식이 조용히 공명하기 시작했다. 릴리의 압도적인 양자 관측 능력과 에단의 예리한 양자 감응 능력이 서로 얽히며 하나의 거대한 의식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그들의 감각은 시공간을 넘어 확장되었고, 목표 지점 – 런던 중심부, 차원 균열 에너지가 소용돌이치는 코바치의 마지막 거점 – 으로 순식간에 ‘도약’했다. 이것은 물리적인 이동이 아니었다. 순수한 의식의 투영, 양자 얽힘을 이용한 초차원적 이동이었다.

코바치의 펜트하우스. 통유리 너머로 펼쳐진 런던의 지옥도를 배경으로, 코바치는 의식의 제단과 같은 곳에 서 있었다. 그의 몸은 하늘의 균열에서 쏟아지는 이질적인 에너지를 게걸스럽게 흡수하며 기괴하게 변형되고 있었다. 피부는 창백하게 빛났고, 혈관 대신 푸른 에너지 라인이 꿈틀거렸으며, 눈동자는 완전히 비인간적인 빛으로 타올랐다. 그는 신이 되기 위한 마지막 변태 과정에 있었다.

그의 주변에는 미라 웰스가 이끄는 마지막 남은 외계 용병들과, 균열 에너지를 흡수하여 더욱 흉측하고 강력해진 퀀텀 하이브리드들이 방어 진형을 갖추고 있었다. 그들은 코바치의 변태가 완료될 때까지 시간을 벌어야 했다.

바로 그때, 에단과 릴리의 통합된 의식이 펜트하우스 중심부에 그림자처럼 나타났다. 물리적인 형태는 아니었지만, 그들의 존재감은 공간 자체를 뒤흔들 정도로 강력했다.

“왔구나, 벌레 같은 놈들.” 코바치가 변형된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그의 의식은 이미 인간의 범주를 벗어나 있었다. “마지막 발악을 하러 온 건가? 아니면… 나의 위대한 탄생을 경배하러?”

“네 광기는 여기서 끝이다, 코바치.” 에단의 차가운 의식이 응수했다.

“끝이라고? 이제 시작일 뿐이다!” 코바치가 포효하며 주변의 균열 에너지를 더욱 격렬하게 끌어당겼다. 그의 최종 계획의 실체가 드러났다. 그는 단순히 힘을 흡수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 차원 균열을 인위적으로 더욱 확장시켜, 지구를 다른 차원 – 아마도 미라 웰스의 세력이 지배하는 – 과 강제로 융합시키려 하고 있었다! 그 융합 과정에서 발생하는 막대한 차원 에너지를 이용하여 자신을 완전한 신적 존재로 만들고, 그 대가로 지구 자체를 미라 웰스 세력에게 제물로 바치는 것. 그것이 그들의 끔찍한 계약의 전모였다.

미라 웰스가 마침내 자신의 본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인간 여성 형태는 홀로그램처럼 흐릿해지더니, 그 자리에 곤충과 파충류를 뒤섞은 듯한, 섬뜩하고 이질적인 외계 존재의 모습이 나타났다. 여러 개의 팔과 빛나는 복안, 날카로운 발톱. 그녀는 더 이상 인간을 연기할 필요가 없었다.

“너희의 저항은 무의미하다.” 미라 웰스의 정신적 목소리가 에단과 릴리의 의식에 직접 울렸다. “이 행성은 곧 우리의 것이 될 것이다. 에크릴의 시대는 끝났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 릴리의 의식이 외쳤다. 그녀는 어머니에게서 얻은 정보와 자신의 능력을 총동원하여, 코바치의 차원 융합 프로세스를 방해하고 그의 에너지 흡수를 차단할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앞에 펼쳐진 현실의 코드 속에서, 그녀는 융합을 가능하게 하는 핵심적인 ‘양자 상수’ 값을 발견했다. 저 값을 바꾸거나 무력화시킨다면…

하지만 코바치와 미라 웰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외계 용병들과 강화 하이브리드들이 일제히 에단과 릴리의 통합된 의식을 향해 물리적, 정신적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펜트하우스는 순식간에 현실과 의식이 뒤섞인 초차원적인 전쟁터로 변모했다.

에단은 릴리가 핵심 작업을 수행할 수 있도록 방어에 집중했다. 그는 자신의 양자 감응 능력을 방패처럼 펼쳐 적들의 정신 공격을 막아내고, 동시에 하이브리드들의 통제 시스템을 교란시켜 그들의 움직임을 방해했다. 그의 의식은 마치 수많은 촉수처럼 뻗어나가 적들의 약점을 파고들었지만, 적들의 수는 너무 많았고 공격은 집요했다. 그의 의식 역시 서서히 마모되어 가고 있었다.

릴리는 필사적이었다. 양자 상수를 바꾸기 위해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정밀성과 에너지가 필요했다. 그녀는 자신의 모든 힘을 집중했지만, 코바치가 끌어들이는 차원 균열의 막대한 에너지가 그녀의 시도를 방해했다. 시간은 점점 더 촉박해져 갔다. 하늘의 핏빛 막은 이제 금방이라도 지구를 삼킬 듯이 팽창하고 있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릴리의 의식이 간절하게 외쳤다.

바로 그때, 아주 희미하지만 따뜻한 에너지 파동이 그녀의 의식을 감쌌다. 엘라나. 그녀는 소멸 직전의 상태에서도 마지막 남은 힘으로 릴리를 지원하고 있었다. 마치 어머니의 손길처럼, 엘라나의 지지와 믿음이 릴리에게 마지막 용기를 불어넣었다.

최후의 결전. 피로 얼룩진 관측 상수를 둘러싼 싸움이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인류의 운명과 우주의 미래가 이제 이 작은 펜트하우스 안에서 결정되려 하고 있었다.